태그 보관용: group show

서보경 개인전: 비상시 조각을 깨시오

요즘미술 기획

서보경 개인전: 비상시 조각을 깨시오

Suh Bo Kyung Solo Exhibition: In Emergency Break Art Piec

2025년 5월 24일(토) ~ 6월 10일(화)
13:00 ~ 19:00 (휴관일 없음)

Breaking Bread: 2025년 6월 10일 화요일 오후 5시(90분)

전시의 마지막 날 조각의 일부를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가집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에 성함과 연락처를 남겨주세요.(선착순 20명) 
행사 중 얼굴을 포함한 일부 장면은 기록 목적으로 촬영됩니다.

《비상시 조각을 깨시오》는 미술이 위기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물질적, 조형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과거, 식량을 저장하는 일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문화 속에서 음식은 점차 이미지로 소비되고, 사회적 경험으로 유통되는 기호가 되었다. 이번 전시는 음식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재구성하고, 그것이 생존 수단에서 사회적 상징으로 전환된 과정을 조각 시리즈를 통해 풀어낸다. 이 조각들은 언제든 먹어 치워질 수도 있고, 부패하거나 존치될 수도 있는 상태를 동시에 지닌다. 이러한 불안정한 물질성은 다가오지 않은 위기에 대비하는 잠재적 생존 장치로서의 조각을 제안한다. 소비로부터 유예된 이 사물들은 전시장 안에서 고요히 대기하며, 어느 날 삶의 긴박한 요구에 반응해 작동하기를 기다린다.

Canvas’ Cabinet

전시명: Canvas’ Cabinet

기획, 참여작가, 디자인, 설치: 김륜아, 이경주, 이예지, 정주원, 진예리 

전시기간: 2025. 5. 4(일)~5. 20(화) 오후 1-7시(휴관일 없음)

오프닝행사: 2025. 5. 4 오후 5시

Curation, Artists, Design, Installation: Luna Kim, Kion Rhie, Yeji Lee, Juwon Jeong, Yeri Jin.

Preface: Yeri Jin

Dates: 2025.5.4~5.20, 1~7pm(No days off)

Venue: 3F, 7, Hyehwa-ro 9 gil, Jongno-gu, Seoul. Art these days

《Canvas’ Cabinet》 작가와의 대화
일시: 2025. 5. 11(일) 오후 2시
장소: 요즘미술(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9길 7, 3층)
참여작가: 김륜아, 이경주,정주원, 진예리
신청: 선착순 13명

Canvas’ Cabinet

진예리

Canvas’ Cabinet은 회화라는 완결된 이미지를 위해 과정적으로 탈락되고, 소외되고, 버려진 수많은 사건들을 복기하여 재구성하는 전시이다. 이를 위해 다섯 작가는 캔버스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다. 김륜아, 이경주, 이예지, 정주원, 진예리는 각자 서랍 속과 머릿속을 뒤적이며 작품의 시작점을 돌이켜 본다. 이들은 완성된 회화 이미지 속에, 아무도 모르게 봉인된 시작점, 작업의 단초가 되던 흩어진 메모들, 과정으로부터 촉발된 우연한 시도의 흔적들을 그러모아 지나간 작업의 과정을 톺아보며 완성이라는 평탄화 과정과 함께 끊어내던 울퉁불퉁한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소환해낸다. 다섯 작가는 그림을 위해 재료들과 맺었던 촉각적 접촉, 압축된 이미지가 되기 이전의 만연체의 말들을 물질적 차원으로 제시하거나,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 잘려나간 과거의 장면들을 현재라는 감각 안으로 소급하여 형태를 통해 건네는 말 없는 질문들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회화가 그저 입이 없을 뿐, 말이 없는 매체가 아님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의 제목인 캔버스의 캐비닛(canvas’ cabinet)은 자기지시적이면서도 자기복제적이진 않은 함의를 내포한다.

김륜아는 그리던 대상을 과감히 뒤덮고 재탄생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며 회화를 완성해나간다. 이때 뒤덮이는 그림은 표면에 덧대어 그려질 대상의 생장을 위한 양분처럼 작동한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조각 작업은, 완성된 화면 아래 묻혀있는 대상들을 화면 밖으로 되살려낸 것들이다. 도자조각들은 회화작업에 과정적 모티브로써 개입하고 기여하는데, 이는 그림의 완성을 돕는 것과 동시에 그림의 제물이 된다. 마치 누군가의 무덤 속 유물을 발굴하여 그의 정체를 유추하며 보이지 않는 과거를 반추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김륜아의 조각들은 완성된 표면 아래 매장된 이미지들 현재의 시공간으로 소생시켜 다시금 생명력을 부여한다. 김륜아는 자신과 회화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실과 충돌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사장된 이미지들의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상실 후 애도(grief or mourning)’처럼 존중과 위로를 동시에 표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자연 건조한 점토 조각들은 전시 중에 관객에게 무료로 나누어진다. 이는 일종의 ‘의례적 장송(葬送)’으로, 작가는 그림에서 밀려나고 지워진 대상들을 완성된 그림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남기는’ 것이 아닌 ‘떠나보내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렇게 관객에게 건네지는 조각들은, 마치 소각된 유골에서 남은 뼛가루처럼 무게는 가볍지만 존재로는 무거운 잔여물이다. 김륜아는 그것들을 조용히 흩뿌리듯 건넨다. 결국 더는 주인의 것이 아닌, 기억의 유예로 남은 무형의 증거들은 관객의 손으로 전달된다.

이예지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들은 길들여진 개라기보다는 들개에 가까운 야생의 느낌을 준다. 가늘고 긴 몸체와 날렵한 듯 단단한 이 개들은, 길 위를 여기 저기 떠돌며 거친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서있다. 꼿꼿함과 유연함, 뻣뻣함과 부드러움 사이를 흐르듯 오가는 형상은 개에게서 느낄 수 있는 친밀감과 낯섦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뒤 개를 매개하여 사라진 망자를 불현 듯 떠올리게 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사후세계, 이승과 저승 같은 종교나 신화적 관점에 기댄 상상은 아니었다. 이예지는 망자의 삶을 상상할 때 어렴풋이 스치는 주마등같은 것을 들개를 통해 매개한다. 그 결과 작품 속 개는 마치 경험해 본 적 없는 노인의 시간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는 건 그저, 살아온 궤적을 더듬듯 그려보는 일뿐이다. 즉, 들개라는 형상으로 거칠게 요약되고 압축되었지만, 이는 이름 모를 감응된 기억이 망자를 소환하는 것이 아닌 망자의 전신(前身)이 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고 끝나버린 삶의 궤적을 마주하게 되는 낯선 방식의 기억이다. 나아가 작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시간의 궤적이 남긴, 희미하지만 깊은 잔상을 다른 대상에서도 발견한다. <The Fish Plate>, <In Plain Sight>, <Cremare Speaks>는 기억하고 있으나 기록하지 못한 시간의 잔상을 붙잡아 그려낸 형상이다. 이들은 감각과 기억, 시간과 존재에 대한 사유의 여운으로 나아간다. 소멸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감각되는 것들에 대한 이예지의 회화는 그렇게, 존재의 부재를 응시하고, 그 여운을 현재의 감각으로 호출한다.

정주원의 그림 속 대상들은 정확한 말로 수렴될 수 없는 감각들로 언어와 이미지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발화 이전의 상태에 머문다. 이는 마치 발아하는 씨앗처럼, 무엇이 될지는 이미 정해져있지만, 어떻게 자라날지는 모르는 존재들이다. 여러 상태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모여 자라나는 형상들은 발랄한 회오리, 주춤하다 지지직 그은 선, 무겁고 고집스러운 막대 같은 것들이 되어 한 화면 안에서, 서로를 밀고 건드리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갑자기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몸이 슬쩍 밀리는 기분처럼,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장난스런 관심처럼, 선과 형태들은 상황과 태도를 담는 의태형(形) 혹은 의성형(形)이 된다. 작가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의 잔류들을 수집하고, 회화의 해석적 측면에 은근슬쩍 등을 돌리며 관객에게 슬며시 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밀어 넣기를 시도한다. 소통에서 발생하는 엉뚱함과 기민한 감정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회화적 발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유도하며 이러한 방식은 의미의 전달이 아닌 감각의 건드림(touch)에 가깝다.

이경주는 여러 칸으로 분할된 관을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상정한 캐릭터인 ‘좀비 소녀’의 삶의 단면들을 수납한다. 칸마다 담긴 대상들을 보고 있자면, 정갈하게 모아둔 신체의 일부들, 강박 혹은 집착적인 희망처럼 보여 짠한 마음이 드는 네잎클로버, 사물과 풍경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화면들이 포착된다. 칸칸이 쪼개진 형태의 관은 온전한 신체도, 시체도 담을 수 없는 구조이기에, 분절된 상태로 담긴 대상들은 마치 관의 형태를 흉내 낸 서랍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죽음과 비루한 갱생을 거치며 ‘나’라는 온전함을 잃은 전적이 있는 좀비소녀에게, 이 서랍은 단순한 수납의 기능에 머물지 않는다. 관은 오히려 은밀하게 수집해온 것들을 저장하는 ‘쉐도우 박스(shadowbox)’같은 것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런 저런 삶의 흔적들이 들어찬 닫힌 방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이를 자유롭게 열고 닫으며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관은 단순히 그림을 보호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액자의 기능을 넘어 의미와 상징을 내포하는 ‘서사의 지지체’가 된다. 즉, 각 칸마다 존재하는 서사적 단서들은 작가가 상정한 ‘좀비 소녀’라는 허구적 인물을 구성하기 위한 장치이다. 좀비소녀라는 사후적 캐릭터는 끊임없이 먹어치우지만 계속해서 허기진 상태를 마주하며 신체의 잔해를 모으고 자신의 관 안에 은밀하게 전시한다. 이는 계속되는 욕망과 이로 인해 해부되는 자아의 모순에 대한 유희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재구성으로, 풀려고 할수록 더욱 엉키고 마는 실 뭉치처럼 입 안에 머물며 소화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혼잣말이다.

진예리는 회화적 행위를 보다 자유롭게 확장하기 위해 OHP필름 여러 장을 연결하여 팔레트로 사용한다. 긁어내고 문지르고 흩뿌려지는 행위가 축적된 결과물로서의 팔레트는, 그림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레이어의 뒷면을 보여준다. 팔레트의 앞면과 뒷면은 완전히 다른 색채와 구성으로, 작가는 평면의 앞면과 뒷면이라는 양면성과 이중성을 자신의 회화로 끌어들인다. 표면이면서 이면인 것, 그림이 아니면서 그림 같은 것을 가시화하기 위해 팔레트의 양면을 오리고 붙이면서 조형적으로 배합하여 조각을 만든다. 그리고 쓰고 버릴 팔레트를 소중한 물건인 냥 모아온 애착과, 오밀조밀한 조각들을 ‘픽시’라는 요정이 인간이 버린 하찮은 물건들을 보물처럼 간직하는 특성으로 연결한다. 작가는 팔레트로 조각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팔레트를 오려서 그림에 붙이거나, 팔레트에 남은 물감들 위로 레진을 부어 투명하게 포를 떠낸다. 나아가 팔레트를 붙이던 풀(Glue)은 드로잉 재료가 되어 캔버스 위에서 반투명한 선이 된다. 6개의 연결된 회화는 ‘~’혹은 ‘?’의 형태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여기저기를 오가듯 평면과 입체 사이를 들락날락 거리며 빛과 동선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적 체험을 유도한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공간을 경험할수록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빌 조각들은 자연스레 관객의 동선을 제한함과 동시에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 그림 속에 숨어있는 팔레트의 흔적들, 그림과 같은 조형적 태도로 제작된 조각들은, 작고 장난기 많은 픽시가 일부러 길을 잃게 만들고, 물건을 숨기는 등, 장난을 치지만 때때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결국 그림에 숨어든 팔레트들은 관객을 방해 할지, 도움을 줄지 작은 개입을 노리며 기웃거린다.

이처럼 『Canvas’ Cabinet』은 회화라는 결과물에 수렴되지 않은, 혹은 애초에 수렴되기를 거부한 감각과 기억, 행위와 잔여물들을 수집하고 배치하는 다섯 작가의 이야기이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면 바깥을 호명하는 이들의 작업은 회화가 봉인한 과거들을 다시 끌어내며, 이들은 마감된 회화의 시간 너머로 몸을 기울여 잘려나간 시작점과 빗겨나간 감각들을 다시 불러내 ‘지금’이라는 입을 빌려 되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한 목소리는 어느새 회화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굳게 닫힌 표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의 ‘캐비닛’이 된다.